기억의 오류

사람의 기억은 어디까지 정확한 것일까? 자신의 기억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나?
남편과 함께 며칠 전 한국에 왔다. 건강 검진도 있고 곧 이사 올 집 상태도 확인하는 등의 일처리를 위해.
짧은 일정이기에 눈썹이 휘날린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온몸으로 느끼면서 하나씩 볼일을 해결하고 있다. 비록 시간적인 여유는 없어도 정신적인 여유만큼은 꼭 확보하자며 서로를 다독이며. 모두 잘 알다시피 대부분의 일은 마음에 여유가 없을때, 잠깐 방심한 사이에 종종 터지곤 한다. 이번에 본인 부부가 딱 그랬다. 오는 당일까지 공식 업무 처리와 기타 등으로 바빴던 남편, 이런 남편 뒷바라지와 이사 준비, 기타 다른 일로 분주했던 본인. 긴 비행 중에 좀 쉬어야지 했던 계획은 두통과 멀미에 내내 시달리면서 물 건너 갔고 인천 국제 공항에 도착할 즈음 남편과 본인은 완전 넉다운 상태였다. 그래도 어찌저찌 정신을 수습해서 부쳤던 짐을 찾고 친정 부모님 댁에 잘 도착했다. 마중 나오신 부모님과 함께 열심히 짐 정리를 하면서 제일 마지막 가방을 여는데, 어라 왜 가방이 열려 있지? 사실 공항에서 짐을 찾을때 1차로 이상한 점을 발견하긴 했다. 어, 왜 가방이 열려있지? 우린 분명히 가방을 잠궜는데. 거기서 확인을 했어야 했다. 그런데 피곤에 쩔어 소금에 절인 배추 상태였던 우리, 실수를 했다. 아, 짐 검사를 했구나. 간혹 X-Ray 상으로 상태가 불분명하게 나오는 경우 가방을 열어서 검사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 그냥 대충 수습해서 나오는데 본인의 신경을 긁는 가방 손잡이에 묶은 빨강 리본. 그냥 단순 빨강 리본으로 묶었는데...저 땡땡이 무늬는 뭐지? 수제품이 아닌 대량 생산되는 기성품 가방인지라 분명 같은 가방이 있을 수도 있어서 눈에 잘 띄는 빨강색 리본으로 가방 손잡이를 묶었다. 근데 리본 다른 면에 땡땡이 무늬가 있었나, 기억이 오락가락. 2차 실수. 여기라도 정신을 차리고 가방 확인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일단 빨리 그곳을 벗어나야겠다는 마음이 더 컸던 나머지 단순히 잘못 기억하고 있었구나 하며 남편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처음과 두번째 모두 남편에게 얘기를 하긴 했다. 가방 확인을 해 보자고. 하지만 역시 물먹은 솜 상태였던 남편은 내용물 확인을 하지 않고 외관 확인만 한 상태에서 별 문제 없다며 얼른 나가자고 몸을 돌렸다. 평소에 본인과 생각이 다르면 남편과 릴레이 대화를 하며 의견을 좁히거나 이해를 시키는 등의 행동을 하지만 역시 가급적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던지라 냉큼 남편을 따라 나섰다. 그 순간 눈에 들어온 커다란 삼각형 스티커. 마지막 기회였다. 그때라도 반드시 확인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기억이 잘못 된거라고 결론을 내린 상태였기 때문에 남편에게 재차 강조하는 대신 성큼성큼 발걸음을 재촉하며 입국 게이트를 빠져 나왔다. 총 3번의 기회가 있었고, 피곤을 핑계로한 주의 깊지 못함으로 정정할 수 있는 3번의 기회를 눈앞에서 놓쳤다. 그 대가는 극피로를 호소하는 몸의 아우성을 무시한채 편도 1시간 30분 거리의 공항을 재차 왕복함으로 치뤄야 했다. 게다가 더욱 심각한 것은 자신의 실수가 아닌 다른 사람의 부주의와 어이없는 실수로 인해 가방이 바뀌어 공항에서 장장 4시간 정도를 오도가도 못하며 동동거려야 했던 가방 주인이 고스란히 떠 안았다는 점이다. 민폐도 이런 민폐가. 4시간 정도면 가까운 동남아를 갈 수 있는 시각인데. 장장 10시간이 넘는 비행에 덤으로 기약없는 기다림까지. 평소에는 꼬박꼬박 적어놓는 가방 이름표를 이번엔 무시하고 적지 않았기에 바뀐 가방을 두고 그분이나 공항 담당자도 당시엔 연락할 방법조차 없었다. 아마 시간이 더 지체되었더라면 입국 신고서에 있는 국내 연락처를 찾아 연락을 하는 등의 방법을 취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나중에서야 들었다. 어쨌든 공항에 도착해서 서로의 가방을 교환하며 표현하기 어려운 미안한 마음을 전하는 우리를 바뀐 가방 주인은 생각보다 무척 덤덤한 모습으로 대해 주었다.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다면서.

그분의 가벼운 응대 덕분에 짧은 해프닝으로 끝난 일이지만 이번 일을 겪으면서 느낀 점이 참 많았다.

잠시의 방심이 가져오는 엄청남과 내 기억이 맞다고 우기는 순간 벌어지는 참담함, 모든 일을 세세하게 챙기기는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장의 끈은 항상 팽팽하게 당기고 있어야 함을.

잠깐의 편리를 위해 집중력을 흐리는 순간 어쩌면 몇 배의 노력을 더해도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사실.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을 가래로 막는다라는 속담처럼 당시 잠깐의 쉬움을 위해 곧 다가 올 시간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그런 어리석음을 다시는 반복하지 말아야겠다.

아울러 내 기억의 오류는 언제 어디에서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열린 귀를 지니며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가방의 정면 모습. 완전 똑같은 가방이다.

왼편은 우리 가방, 오른편은 우리가 바꿔 간 다른 분의 가방이다. 땡땡이 무늬가 살짝 보인다.

왼편이 우리가 바꿔 들고 간 땡땡이 무늬의 가방이다. 뒷면에 이렇게 삼각 스티커가 붙여져 있었다. 오른편의 우리 가방엔 스티커가 없다.

이상 미치르~♡